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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원 기자]
우리나라에서 '월북'만큼 치명적인 낙인이 또 있을까. 정치인이든, 예술가든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조국을 배반한 사람들로 인식된다. 오로지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 독립운동가들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분명히 있을 텐데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월북해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이들은 마치 '호적에서 이름을 파듯' 독립운동사에서 이름을 지웠고, 그들의 독립운동 공적은 통째로 무시됐다. '친일'보다 '친북'이 더 나쁘다는 부박한 인식 속에서 그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했다. 친일 청산에 실패한 역사의 후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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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도선 이남에서 나고 자란 인물들
▲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신리에 자 바다이야기예시야마토게임 리한 이쾌대의 생가터 모습. 집터의 자취는 사라지고 없다.
ⓒ 서부원
김두봉, 김약수, 김원봉, 박헌영, 백남운, 이여성, 홍명희 등. 우리에겐 '빨갱이'라는 수식어가 더 익숙하지만, 사이다쿨바다이야기게임 하나같이 시대를 풍미했던 '거물급' 독립운동가들이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현대사 영역에서 한 번쯤 거론되는 인물들로, 모두 38도선 이남에서 나고 자랐다.
월북이라는 '흠결'만 빼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서 그들의 업적은 청사에 빛난다. 김두봉은 조선독립동맹의 주석이자 '말모이 운동'을 이끈 국어학자다. 김약수는 손오공릴게임예시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을 주도했으며, 의열단의 '의백' 김원봉은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불세출의 독립운동가다.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사회주의 혁명가 박헌영과 일제 식민사관을 논파한 경제사학자 백남운의 위상도 남다르다. 여운형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끈 이여성은 화가이자 학자로서도 이름이 높다. 홍명희는 대표적인 항일 언론인이자 소설 <임꺽 바다신2게임 정>은 저술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들의 공적을 감춘다면 자랑스러운 우리 독립운동사는 반쪽짜리로 전락하게 된다. 정부가 건국 훈장을 수여하지는 못할지언정 차마 그들의 이름을 교과서 등에서 삭제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저 월북으로 인해 그들 스스로 이름에 오점을 남겼다는 식으로 눙칠 따름이다.
그나마 그들의 이름을 교과서에서라도 만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정작 태어난 고향에서 그들의 흔적은 깨끗이 지워졌다. 아는 이도 없을뿐더러 안다고 해도 여전히 답하길 꺼린다. 서슬 퍼런 연좌제의 굴레 속에 친인척들은 모두 떠났고, 무심한 세월 속에 집성촌은 와해되었다.
과거 영화 <암살>과 <밀정> 등에서 카메오로 출연해 이름을 널리 알린 김원봉의 사례 정도가 예외다. 지방정부는 그의 생가터에 '의열기념관'을 건립하여, 경남 밀양이 그의 고향이자 독립운동의 산실이었음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적어도 그곳에서 월북의 낙인은 찾아볼 수 없다.
월북한 후 북한 정권에서 부수상을 역임했던 홍명희의 경우엔 사정이 조금 복잡하다. 충북 괴산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긴 하지만, 그의 이름을 앞세우진 못한다. 대신 그의 선친인 홍범식의 이름을 내걸고 있다. 홍범식은 국권 피탈 직후 자결로서 일제에 저항한 우국지사다.
그렇듯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덕에 관광객 유치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거나 혈족 내 명망가를 둔 경우가 아니라면, 현재로선 월북을 상쇄할 수 있는 공적이란 없다. 꿈같은 이야기지만, 남과 북이 통일되거나 적어도 우리 안에 잠재된 분단의 모순이 극복되어야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아이의 질문
▲ 이쾌대의 생가터에 인접한 칠곡 경수당의 사랑채. 조선 중기의 문신 이윤우가 지은 집으로, 현재 벽진 이씨의 종택 역할을 하고 있다. 이쾌대가 태어날 즈음엔 그의 집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수당의 담장은 '담양벽'으로 명명되었는데, 이윤우가 담양부사로 재직할 당시 선정을 베푼 것에 대한 보답으로 전라도 담양 주민들이 이곳까지 와서 담벼락을 쌓았다고 전한다.
ⓒ 서부원
"선생님, 이쾌대가 무슨 뜻이에요?"
이번 답사 여행은 한 아이의 뜬금없는 질문에서 비롯됐다. 그는 이쾌대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고,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림 아래에 적힌 작가의 이름을 마치 일본의 대학이나 단체의 이름으로 여겼던 거다. 생몰 연도라도 적혀 있었다면 '오해'를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아이들은 그의 작품들은 익숙해했지만, 그의 이름은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전시회가 아니더라도 미술책이나 잡지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림이라고 알은체했다. 급기야 그들의 호기심은 '한국 사실주의 미술의 선구자'라는 평가에도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수렴됐다.
이는 우리 현대사에서 월북의 낙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본 계기가 됐고,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의 고향인 경북 칠곡으로 차를 몰았다. 월북 작가인 그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다만, 그곳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아이들에게 답변 삼아 보여주고 싶었다.
그의 생가터는 인터넷 블로그 등을 통해 쉽게 검색할 수 있다.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신리 49번지. 이웃한 39번지라는 주장도 있으나, 큰 의미는 없을 듯하다. 당시 그의 집안은 인근에서 내로라하는 만석꾼이었던 터라 사실상 주변이 전부 그의 집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방정부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에도 그의 생가터 전경을 담은 사진이 탑재되어 있다. 논밭으로 변한 황량한 빈터여서, 설명이 없다면 그의 생가터라는 사실을 알 길 없다. 지금은 옆으로 KTX 철길이 지나고 농공단지와 비닐하우스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다소 번잡스럽다.
예상대로 이곳에서 나고 자란 우리나라 현대 미술사의 거물을 아는 주민은 없었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경주 이씨의 집터라고 말하는 분은 있어도, 이쾌대라는 이름에는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고로, 앞서 말한 월북 정치인 이여성도 이곳이 고향으로, 이쾌대의 친형이다.
아이들이 그의 그림을 익숙해하는 건, 지난 1988년에 단행된 정부의 '해금' 조치 덕분이다. 그들의 작품은 빛을 보았을지언정 그들의 이름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월북 작가라는 족쇄에 묶여 있다. 흡사 '작자 미상'의 작품들이 걸작으로 칭송되는 '웃픈' 현실이다.
자자손손 쉬쉬하고 주민들조차 외면할 만큼 그의 월북이 '죽을죄'였을까. 그는 6.25 전쟁 중 서울에 남아 북한군의 포로로 부역해야 했다. 만삭 중인 아내로 인해 피난을 떠날 수 없었던 거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된 뒤엔 반대로 국군의 포로가 되어 갇힌 신세가 되었다.
정전 협정 당시 포로 교환 때 그는 북을 선택했다. 피난을 떠나지 못해 북한군에게 부역한 이들의 처참한 말로를 똑똑히 지켜봤을 테고, 친형인 이여성이 이미 북으로 건너간 상황에서 그의 월북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남았다고 해도 이승만 정부가 그를 살려둘 리 없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월북이라는 행위만 문제 삼아선 곤란하다. 국외에서 독립운동하다 미국과 소련의 38도선 획정으로 귀국할 때 북으로 간 이들도 있고, 해방 후 미군정의 탄압에 시달리다 월북한 이들도 있다. 그들은 미소 냉전과 이념 대립의 희생양이었다.
그들에게 '빨갱이'라는 일률적인 낙인은 가당찮다. 후세 역사가들이 좌익계로 두루뭉수리 뭉뚱그릴지언정 그들 중엔 민족주의자를 자처한 이들도 여럿이다. 알다시피,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는 서로 갈등하고 협력하며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 세력의 두 축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의 친형 이여성도 미군정의 탄압이 노골화하는 상황에서 건준을 함께 이끈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월북을 감행한 것이다. 친일 경찰에게 고문을 당한 김원봉도,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수감된 김약수도, 정판사 위폐 사건에 연루된 박헌영 등도 '자발적' 월북은 아니다.
실없는 질문일 테지만, 만약 그들이 월북하지 않고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의해 '순순히' 처단당했다면 역사는 그들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분단의 모순이 극복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 해방 공간에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맞섰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었다. 월북은 충분조건일 뿐 필요조건은 아니다.
일단 해방 후 북을 선택했다면 독립운동의 공적을 박탈하는 게 우리 정부의 확고한 원칙이자 오랜 관행이다. 적어도 월북엔 그 어떤 이유도 허용되지 않는다. 사회주의를 배격한 민족주의자라도 월북한 사실이 밝혀지면 건국 훈장을 받을 수 없지만, 뼛속 깊은 사회주의자라도 해방 전에 숨졌다면 가능하다.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는 해방에서 끝나야 정상인데도, 우리 정부는 이후 수립된 북한 정권과 이념 성향까지 기준 삼고 있다. 흥미로운 건, 월북 이후 김일성에 의해 처형되거나 숙청되었다는 사실은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월북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주홍 글씨'다.
요컨대, 우리 사회에 '두 번째 해금'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1988년 월북 작가의 '작품'을 해금했다면, 이젠 '작가'를 해금할 차례다. 더불어 월북 정치인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도 시작해야 한다. 남과 북에서 모두 버림받은 독립운동가들이 많다는 건, 우리 현대사의 그늘이다.
우리나라에서 '월북'만큼 치명적인 낙인이 또 있을까. 정치인이든, 예술가든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조국을 배반한 사람들로 인식된다. 오로지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 독립운동가들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분명히 있을 텐데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월북해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이들은 마치 '호적에서 이름을 파듯' 독립운동사에서 이름을 지웠고, 그들의 독립운동 공적은 통째로 무시됐다. '친일'보다 '친북'이 더 나쁘다는 부박한 인식 속에서 그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했다. 친일 청산에 실패한 역사의 후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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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신리에 자 바다이야기예시야마토게임 리한 이쾌대의 생가터 모습. 집터의 자취는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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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봉, 김약수, 김원봉, 박헌영, 백남운, 이여성, 홍명희 등. 우리에겐 '빨갱이'라는 수식어가 더 익숙하지만, 사이다쿨바다이야기게임 하나같이 시대를 풍미했던 '거물급' 독립운동가들이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현대사 영역에서 한 번쯤 거론되는 인물들로, 모두 38도선 이남에서 나고 자랐다.
월북이라는 '흠결'만 빼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서 그들의 업적은 청사에 빛난다. 김두봉은 조선독립동맹의 주석이자 '말모이 운동'을 이끈 국어학자다. 김약수는 손오공릴게임예시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을 주도했으며, 의열단의 '의백' 김원봉은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불세출의 독립운동가다.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사회주의 혁명가 박헌영과 일제 식민사관을 논파한 경제사학자 백남운의 위상도 남다르다. 여운형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끈 이여성은 화가이자 학자로서도 이름이 높다. 홍명희는 대표적인 항일 언론인이자 소설 <임꺽 바다신2게임 정>은 저술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들의 공적을 감춘다면 자랑스러운 우리 독립운동사는 반쪽짜리로 전락하게 된다. 정부가 건국 훈장을 수여하지는 못할지언정 차마 그들의 이름을 교과서 등에서 삭제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저 월북으로 인해 그들 스스로 이름에 오점을 남겼다는 식으로 눙칠 따름이다.
그나마 그들의 이름을 교과서에서라도 만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정작 태어난 고향에서 그들의 흔적은 깨끗이 지워졌다. 아는 이도 없을뿐더러 안다고 해도 여전히 답하길 꺼린다. 서슬 퍼런 연좌제의 굴레 속에 친인척들은 모두 떠났고, 무심한 세월 속에 집성촌은 와해되었다.
과거 영화 <암살>과 <밀정> 등에서 카메오로 출연해 이름을 널리 알린 김원봉의 사례 정도가 예외다. 지방정부는 그의 생가터에 '의열기념관'을 건립하여, 경남 밀양이 그의 고향이자 독립운동의 산실이었음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적어도 그곳에서 월북의 낙인은 찾아볼 수 없다.
월북한 후 북한 정권에서 부수상을 역임했던 홍명희의 경우엔 사정이 조금 복잡하다. 충북 괴산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긴 하지만, 그의 이름을 앞세우진 못한다. 대신 그의 선친인 홍범식의 이름을 내걸고 있다. 홍범식은 국권 피탈 직후 자결로서 일제에 저항한 우국지사다.
그렇듯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덕에 관광객 유치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거나 혈족 내 명망가를 둔 경우가 아니라면, 현재로선 월북을 상쇄할 수 있는 공적이란 없다. 꿈같은 이야기지만, 남과 북이 통일되거나 적어도 우리 안에 잠재된 분단의 모순이 극복되어야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아이의 질문
▲ 이쾌대의 생가터에 인접한 칠곡 경수당의 사랑채. 조선 중기의 문신 이윤우가 지은 집으로, 현재 벽진 이씨의 종택 역할을 하고 있다. 이쾌대가 태어날 즈음엔 그의 집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수당의 담장은 '담양벽'으로 명명되었는데, 이윤우가 담양부사로 재직할 당시 선정을 베푼 것에 대한 보답으로 전라도 담양 주민들이 이곳까지 와서 담벼락을 쌓았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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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쾌대가 무슨 뜻이에요?"
이번 답사 여행은 한 아이의 뜬금없는 질문에서 비롯됐다. 그는 이쾌대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고,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림 아래에 적힌 작가의 이름을 마치 일본의 대학이나 단체의 이름으로 여겼던 거다. 생몰 연도라도 적혀 있었다면 '오해'를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아이들은 그의 작품들은 익숙해했지만, 그의 이름은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전시회가 아니더라도 미술책이나 잡지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림이라고 알은체했다. 급기야 그들의 호기심은 '한국 사실주의 미술의 선구자'라는 평가에도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수렴됐다.
이는 우리 현대사에서 월북의 낙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본 계기가 됐고,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의 고향인 경북 칠곡으로 차를 몰았다. 월북 작가인 그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다만, 그곳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아이들에게 답변 삼아 보여주고 싶었다.
그의 생가터는 인터넷 블로그 등을 통해 쉽게 검색할 수 있다.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신리 49번지. 이웃한 39번지라는 주장도 있으나, 큰 의미는 없을 듯하다. 당시 그의 집안은 인근에서 내로라하는 만석꾼이었던 터라 사실상 주변이 전부 그의 집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방정부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에도 그의 생가터 전경을 담은 사진이 탑재되어 있다. 논밭으로 변한 황량한 빈터여서, 설명이 없다면 그의 생가터라는 사실을 알 길 없다. 지금은 옆으로 KTX 철길이 지나고 농공단지와 비닐하우스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다소 번잡스럽다.
예상대로 이곳에서 나고 자란 우리나라 현대 미술사의 거물을 아는 주민은 없었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경주 이씨의 집터라고 말하는 분은 있어도, 이쾌대라는 이름에는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고로, 앞서 말한 월북 정치인 이여성도 이곳이 고향으로, 이쾌대의 친형이다.
아이들이 그의 그림을 익숙해하는 건, 지난 1988년에 단행된 정부의 '해금' 조치 덕분이다. 그들의 작품은 빛을 보았을지언정 그들의 이름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월북 작가라는 족쇄에 묶여 있다. 흡사 '작자 미상'의 작품들이 걸작으로 칭송되는 '웃픈' 현실이다.
자자손손 쉬쉬하고 주민들조차 외면할 만큼 그의 월북이 '죽을죄'였을까. 그는 6.25 전쟁 중 서울에 남아 북한군의 포로로 부역해야 했다. 만삭 중인 아내로 인해 피난을 떠날 수 없었던 거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된 뒤엔 반대로 국군의 포로가 되어 갇힌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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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월북이라는 행위만 문제 삼아선 곤란하다. 국외에서 독립운동하다 미국과 소련의 38도선 획정으로 귀국할 때 북으로 간 이들도 있고, 해방 후 미군정의 탄압에 시달리다 월북한 이들도 있다. 그들은 미소 냉전과 이념 대립의 희생양이었다.
그들에게 '빨갱이'라는 일률적인 낙인은 가당찮다. 후세 역사가들이 좌익계로 두루뭉수리 뭉뚱그릴지언정 그들 중엔 민족주의자를 자처한 이들도 여럿이다. 알다시피,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는 서로 갈등하고 협력하며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 세력의 두 축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의 친형 이여성도 미군정의 탄압이 노골화하는 상황에서 건준을 함께 이끈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월북을 감행한 것이다. 친일 경찰에게 고문을 당한 김원봉도,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수감된 김약수도, 정판사 위폐 사건에 연루된 박헌영 등도 '자발적' 월북은 아니다.
실없는 질문일 테지만, 만약 그들이 월북하지 않고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의해 '순순히' 처단당했다면 역사는 그들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분단의 모순이 극복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 해방 공간에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맞섰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었다. 월북은 충분조건일 뿐 필요조건은 아니다.
일단 해방 후 북을 선택했다면 독립운동의 공적을 박탈하는 게 우리 정부의 확고한 원칙이자 오랜 관행이다. 적어도 월북엔 그 어떤 이유도 허용되지 않는다. 사회주의를 배격한 민족주의자라도 월북한 사실이 밝혀지면 건국 훈장을 받을 수 없지만, 뼛속 깊은 사회주의자라도 해방 전에 숨졌다면 가능하다.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는 해방에서 끝나야 정상인데도, 우리 정부는 이후 수립된 북한 정권과 이념 성향까지 기준 삼고 있다. 흥미로운 건, 월북 이후 김일성에 의해 처형되거나 숙청되었다는 사실은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월북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주홍 글씨'다.
요컨대, 우리 사회에 '두 번째 해금'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1988년 월북 작가의 '작품'을 해금했다면, 이젠 '작가'를 해금할 차례다. 더불어 월북 정치인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도 시작해야 한다. 남과 북에서 모두 버림받은 독립운동가들이 많다는 건, 우리 현대사의 그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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