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비아그라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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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린운 0 Comments 29 Views 25-12-07 20:41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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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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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연, 그 설렘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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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gamemong.info
원효대사가 입적한 곳으로 추정되는 골굴사의 문화유적 보물 마애석불좌상.
원효대사의 길은 왕궁과 지척에 있는 분황사와 황룡사에서 크게 두드러진다. 원효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지역에 초개사와 사라사 등의 사찰을 세우고, 고선사를 거쳐 기원정사와 임정사의 기운을 모아 기림사를 크게 중창한다.
기림사에서 깨달음이 더욱 깊어지고, 신라가 전쟁으로 피폐해지면서 백성들의 삶도 궁핍하게 되자 스님의 몸으로도 전쟁터를 누비며 호국불교를 실천하는 승병이 됐다. 그는 또 백성들을 위한 깨달음의 길을 걸었다 체리마스터모바일 .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인도 광유선승의 발자취를 더듬어 궁극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 백일 밤낮을 기도하면서 드디어 육천통에 이르러 신선이 됐다. 광유선승이 처음 불도를 전하려 기도하던 혈사가 원효의 열반을 이끈 도량이 됐다.
릴게임온라인
광유선승 등이 신라시대 처음 불교를 전래하며 수련한 곳으로 전하는 혈사에 모셔지고 있는 원효대사 소상.
◆신화전설 1: 원효의 끊없는 질문
원효는 깨달음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질문도 끝없이 일어났다. 그의 질문은 기행으로, 참선으로, 무애춤으로 발전하는 등 릴게임추천 다양한 모습으로 답을 찾아가는 신화를 낳았다. 그 신화는 원효의 깨달음을 더욱 깊게 하면서 백성들의 마음에 평화를 심어주는 신라 불교의 기둥이 됐다.
기림사를 중창한 원효대사는 다시 처음 혈사를 거쳐 임정사를 창건한 인도 광유선승의 흔적에서 궁금증이 또 일어났다. 그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혈사 골굴사, 고선사로 걸음을 이어갔다. 그의 기행 릴게임다운로드 은 삼국유사 등에 다양하게 실려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효대사가 고선사에 주석할 때 경주 만선북리에 살고 있던 사복이 찾아와 "그대와 내가 옛날 경전을 싣고 다니던 암소(사복의 어머니)가 죽었으니 함께 가서 장사 지내자"라고 하여 같이 장례를 지냈다. 그때 원효대사가 "나지를 말지어다, 그 죽음이 괴롭다. 죽지 릴박스 말지어다, 그 태어남이 괴롭다"고 했고, 이에 사복이 말이 번거롭다 하니 대사는 "죽는 것도, 나는 것도 모두 괴롭다"고 말했다.
골굴사의 가장 규모가 크게 남아있는 혈사 법당굴에 석불과 원효대사 소상을 모시고 있다.
상여를 매고 산기슭에 가서 원효대사가 "지혜의 호랑이를 지혜의 숲속에 묻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사복이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라쌍수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지금 그와 같은 사람이 있어 연화장세계에 들어가려 한다" 하고 풀을 뽑으니 그 아래 맑은 연화장세계가 펼쳐졌다. 사복이 어머니 시체를 업고 그 안으로 들어가자 땅이 다시 평평해졌다. 원효스님은 이에 돌아왔다.
전생에 암소가 복을 지어 사복의 어머니로 태어나고 내생에 서방정토 연화장세계에 노닌다는 극적인 이야기다. 사복스님은 과부의 사생아로 태어나 뱀 같이 기어다닌다고 해서 뱀동이라 불리었다. 그러나 뱀처럼 밑바닥 민중들과 함께 잠행하며 보살행을 실천한 수행자여서 나중 흥륜사 금당에 신라 십성에 모셔져 원효, 의상스님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다.
오어사에서 원효스님과 서로 법력을 희롱했던 혜공스님도 노비 출신이나 무애행으로 대중을 교화했다. 당대 일급 논사인 원효대사를 일거에 법력으로 누르는 사복과 선선히 승복하는 원효의 대조적인 모습이다. 진흙 속에도 진주가 밝게 빛남을 보여준 원효스님의 대자비심을 읽게 한다.
인도 광유선승 일행이 신라시대 불교를 전파했던 흔적 12개의 혈사들이 골굴사 암벽에 남아있다.
◆흔적: 석굴사원 골굴사
골굴사는 함월산으로도 불리는 토함산 동남자락 기림사 입구에 있다. 과거 왜병들이 동해안에 상륙해 불국사를 지나 보문단지의 명활산성으로 이어지는 침략로 초입에 골굴사가 위치해 있는 것이다.
골굴사는 1천500여년 전에 인도에서 온 광유성인 일행이 함월산에 이르러 12개의 석굴에서 불법을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석굴사원을 형성했다는 기록이 기림사사적기로 전하고 있다. 기림사의 전신 임정사 또한 골굴사에 거쳐하던 인도의 승려들이 창건했다는 기록이다. 기림사보다 골굴사의 역사가 깊다는 것과 신라에 불교가 전해진 역사를 뒤집는 말이다.
기림사 사적기는 천생석굴의 위치와 십이구로 나뉘어 각기 이름을 지어 불공을 드리는 암자로 활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설산, 단특산 등으로 불리었다고 남아 있다. 기록처럼 지금도 12개의 석굴 흔적이 있고, 6개의 석굴이 불공을 드리는 암자로 활용되고 있다. 법당굴은 굴이 깊고 넓으며 전실이 기와집으로 마련돼 전형적인 석굴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골굴사가 수행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수련했던 선무도를 복원 전파하고 있다. 선무도 체험공연.
골굴사는 기림사보다 앞서 지어진 불교유적으로 원효대사가 입적한 혈사로 추정되고 있기도 하다. 원효가 617년 출생해 686년 혈사에서 입적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정확하게 혈사의 위치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행적이 기림사에 기거하다 혈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마무리되고, 당시 기림사 인근에 혈사가 있었던 곳은 골굴사가 유일하므로 골굴사에서 원효가 입적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골굴사는 보물 마애여래좌상의 미소가 있는 문화유적이다. 인도의 광유성인 일행이 1천500여년 전에 석굴사원을 창건했다지만 화재 등으로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 석굴사원 혈사 본래의 모습으로 문화재적 가치를 회복해 불교 전래역사의 뿌리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불교순례에 나서는 이들의 열망이 꽃을 피울 것으로 기대된다.
골굴사를 세계적인 석굴사원으로 알려지게 한 것은 선무도와 함께 12개의 혈사, 그리고 암벽에 새겨진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함월산 골굴사 암벽에 새겨진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은 보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경주 전역의 불적들이 대부분 화강암 단단한 재질로 조성된 것과 다르게 골굴사 유적들은 사암과 이암, 석회암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쉽게 마모·훼손된다.
골굴사는 선무도 공연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매일 오후 3시면 선무도 공연이 벌어져 이를 보기 위한 방문객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선무도는 승려들의 무예를 전승 발전시킨 무도다. 승려들이 체력을 단련하고 정신수양의 근본으로 삼기 위해 수련했던 무도가 발전해 체계화된 것이다. 골굴사 주지 설적운 스님이 선무도 대금강문 문주로 선무도 계승 발전에 직접 나서고 있다.
골굴사는 템플스테이에서 참선은 물론 선무도와 궁도, 승마체험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국내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도 찾는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면서 힐링센터로 주목받고 있다.
골굴사의 선무도 공연과 문화체험을 위해 조성한 관음지.
◆신화전설 2: 원효 육천통에 이르다
원효는 백성들의 삶 속에서 뒹굴면서 다시 고민이 찾아왔다. 자신이 부처가 된다고 해서 바로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또한 모든 백성들이 부처라는 걸 깨닫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려면 혼자 떠돌며 일러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고심하던 원효는 결국 자신의 무릎을 탁 치면서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요석공주와 일가를 이룬다면 자신의 뜻을 펼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 이후 원효는 분황사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많은 책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대승기승론을 비롯해 그의 생각이 붓끝에서 말 달리듯 쏟아져 나와 100여 종, 240여 권의 책을 써내려갔다.
원효는 책을 쓰면서 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진실로 모든 백성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어 잘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를 찾아야 했다. 더 깊은 고민으로 온 백성들을 위한 실천적 학문을 익히기 위해 원효는 고선사로 자리를 옮겼다.
고요하게 깊은 토함산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길의 태동을 보며 고선사에서 참선에 들었다. 저잣거리를 떠돌며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유랑하던 원효의 자세가 돌변한 것이다.
골굴사에 남아 있는 신라시대부터 전해오고 있는 혈사.
세상사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화두에서 더 깊이 들어가 마음이 머무는 곳에 육신도 함께 머물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참선에 들었다. 원효는 육천통의 실마리를 잡고 토함산 능선을 넘어 임정사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임정사를 크게 중창하고, 석가모니의 기원정사와 첫 글자를 따서 기림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원효는 기림사에서 다시 자신을 찾아가는 고민에 빠졌다. 갖가지 방식의 참선과 혜공스님을 찾아가 문답으로 궁금증을 풀어보는 수행을 이어갔다.
그러다 이미 수백 년 전 인도에서 온 광유선승이 득도한 흔적을 발견하고, 고민하고 고민하던 끝에 육천통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천리 밖에서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경지를 체험하면서 더욱 수련에 매진했다. 원효는 드디어 육천통에 이르렀다. 천시통, 천후통, 천미통, 천촉통, 천이통, 천심통의 능력을 오롯이 터득했다.
원효는 시간을 거슬러 전생에 자신의 모습을 만나고, 다시 내세의 자신을 만나기 위해 혈사에서 석 달 열흘을 벽만 마주하고 참선에서 들었다. 그것이 원효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행위였다. 앉은 자세 그대로 영원한 안식으로 입적했다. 자유로운 몸이 된 것이다.
이미 육신은 의미가 없는 껍질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무가 되고, 참새가 되었다가 토끼·노루가 되는 것도 이미 마음만 먹으면 이루어지는 경지에 이르렀던 그의 깨달음의 깊이는 한량이 없었다.
오직 혈사에 남은 것은 원효의 정신이 빠져나간 육신일 뿐이다. 영원을 사는 생명체가 돼 지금도 신라의 터를 부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원효대사의 길은 왕궁과 지척에 있는 분황사와 황룡사에서 크게 두드러진다. 원효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지역에 초개사와 사라사 등의 사찰을 세우고, 고선사를 거쳐 기원정사와 임정사의 기운을 모아 기림사를 크게 중창한다.
기림사에서 깨달음이 더욱 깊어지고, 신라가 전쟁으로 피폐해지면서 백성들의 삶도 궁핍하게 되자 스님의 몸으로도 전쟁터를 누비며 호국불교를 실천하는 승병이 됐다. 그는 또 백성들을 위한 깨달음의 길을 걸었다 체리마스터모바일 .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인도 광유선승의 발자취를 더듬어 궁극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 백일 밤낮을 기도하면서 드디어 육천통에 이르러 신선이 됐다. 광유선승이 처음 불도를 전하려 기도하던 혈사가 원효의 열반을 이끈 도량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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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유선승 등이 신라시대 처음 불교를 전래하며 수련한 곳으로 전하는 혈사에 모셔지고 있는 원효대사 소상.
◆신화전설 1: 원효의 끊없는 질문
원효는 깨달음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질문도 끝없이 일어났다. 그의 질문은 기행으로, 참선으로, 무애춤으로 발전하는 등 릴게임추천 다양한 모습으로 답을 찾아가는 신화를 낳았다. 그 신화는 원효의 깨달음을 더욱 깊게 하면서 백성들의 마음에 평화를 심어주는 신라 불교의 기둥이 됐다.
기림사를 중창한 원효대사는 다시 처음 혈사를 거쳐 임정사를 창건한 인도 광유선승의 흔적에서 궁금증이 또 일어났다. 그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혈사 골굴사, 고선사로 걸음을 이어갔다. 그의 기행 릴게임다운로드 은 삼국유사 등에 다양하게 실려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효대사가 고선사에 주석할 때 경주 만선북리에 살고 있던 사복이 찾아와 "그대와 내가 옛날 경전을 싣고 다니던 암소(사복의 어머니)가 죽었으니 함께 가서 장사 지내자"라고 하여 같이 장례를 지냈다. 그때 원효대사가 "나지를 말지어다, 그 죽음이 괴롭다. 죽지 릴박스 말지어다, 그 태어남이 괴롭다"고 했고, 이에 사복이 말이 번거롭다 하니 대사는 "죽는 것도, 나는 것도 모두 괴롭다"고 말했다.
골굴사의 가장 규모가 크게 남아있는 혈사 법당굴에 석불과 원효대사 소상을 모시고 있다.
상여를 매고 산기슭에 가서 원효대사가 "지혜의 호랑이를 지혜의 숲속에 묻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사복이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라쌍수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지금 그와 같은 사람이 있어 연화장세계에 들어가려 한다" 하고 풀을 뽑으니 그 아래 맑은 연화장세계가 펼쳐졌다. 사복이 어머니 시체를 업고 그 안으로 들어가자 땅이 다시 평평해졌다. 원효스님은 이에 돌아왔다.
전생에 암소가 복을 지어 사복의 어머니로 태어나고 내생에 서방정토 연화장세계에 노닌다는 극적인 이야기다. 사복스님은 과부의 사생아로 태어나 뱀 같이 기어다닌다고 해서 뱀동이라 불리었다. 그러나 뱀처럼 밑바닥 민중들과 함께 잠행하며 보살행을 실천한 수행자여서 나중 흥륜사 금당에 신라 십성에 모셔져 원효, 의상스님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다.
오어사에서 원효스님과 서로 법력을 희롱했던 혜공스님도 노비 출신이나 무애행으로 대중을 교화했다. 당대 일급 논사인 원효대사를 일거에 법력으로 누르는 사복과 선선히 승복하는 원효의 대조적인 모습이다. 진흙 속에도 진주가 밝게 빛남을 보여준 원효스님의 대자비심을 읽게 한다.
인도 광유선승 일행이 신라시대 불교를 전파했던 흔적 12개의 혈사들이 골굴사 암벽에 남아있다.
◆흔적: 석굴사원 골굴사
골굴사는 함월산으로도 불리는 토함산 동남자락 기림사 입구에 있다. 과거 왜병들이 동해안에 상륙해 불국사를 지나 보문단지의 명활산성으로 이어지는 침략로 초입에 골굴사가 위치해 있는 것이다.
골굴사는 1천500여년 전에 인도에서 온 광유성인 일행이 함월산에 이르러 12개의 석굴에서 불법을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석굴사원을 형성했다는 기록이 기림사사적기로 전하고 있다. 기림사의 전신 임정사 또한 골굴사에 거쳐하던 인도의 승려들이 창건했다는 기록이다. 기림사보다 골굴사의 역사가 깊다는 것과 신라에 불교가 전해진 역사를 뒤집는 말이다.
기림사 사적기는 천생석굴의 위치와 십이구로 나뉘어 각기 이름을 지어 불공을 드리는 암자로 활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설산, 단특산 등으로 불리었다고 남아 있다. 기록처럼 지금도 12개의 석굴 흔적이 있고, 6개의 석굴이 불공을 드리는 암자로 활용되고 있다. 법당굴은 굴이 깊고 넓으며 전실이 기와집으로 마련돼 전형적인 석굴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골굴사가 수행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수련했던 선무도를 복원 전파하고 있다. 선무도 체험공연.
골굴사는 기림사보다 앞서 지어진 불교유적으로 원효대사가 입적한 혈사로 추정되고 있기도 하다. 원효가 617년 출생해 686년 혈사에서 입적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정확하게 혈사의 위치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행적이 기림사에 기거하다 혈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마무리되고, 당시 기림사 인근에 혈사가 있었던 곳은 골굴사가 유일하므로 골굴사에서 원효가 입적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골굴사는 보물 마애여래좌상의 미소가 있는 문화유적이다. 인도의 광유성인 일행이 1천500여년 전에 석굴사원을 창건했다지만 화재 등으로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 석굴사원 혈사 본래의 모습으로 문화재적 가치를 회복해 불교 전래역사의 뿌리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불교순례에 나서는 이들의 열망이 꽃을 피울 것으로 기대된다.
골굴사를 세계적인 석굴사원으로 알려지게 한 것은 선무도와 함께 12개의 혈사, 그리고 암벽에 새겨진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함월산 골굴사 암벽에 새겨진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은 보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경주 전역의 불적들이 대부분 화강암 단단한 재질로 조성된 것과 다르게 골굴사 유적들은 사암과 이암, 석회암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쉽게 마모·훼손된다.
골굴사는 선무도 공연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매일 오후 3시면 선무도 공연이 벌어져 이를 보기 위한 방문객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선무도는 승려들의 무예를 전승 발전시킨 무도다. 승려들이 체력을 단련하고 정신수양의 근본으로 삼기 위해 수련했던 무도가 발전해 체계화된 것이다. 골굴사 주지 설적운 스님이 선무도 대금강문 문주로 선무도 계승 발전에 직접 나서고 있다.
골굴사는 템플스테이에서 참선은 물론 선무도와 궁도, 승마체험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국내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도 찾는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면서 힐링센터로 주목받고 있다.
골굴사의 선무도 공연과 문화체험을 위해 조성한 관음지.
◆신화전설 2: 원효 육천통에 이르다
원효는 백성들의 삶 속에서 뒹굴면서 다시 고민이 찾아왔다. 자신이 부처가 된다고 해서 바로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또한 모든 백성들이 부처라는 걸 깨닫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려면 혼자 떠돌며 일러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고심하던 원효는 결국 자신의 무릎을 탁 치면서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요석공주와 일가를 이룬다면 자신의 뜻을 펼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 이후 원효는 분황사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많은 책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대승기승론을 비롯해 그의 생각이 붓끝에서 말 달리듯 쏟아져 나와 100여 종, 240여 권의 책을 써내려갔다.
원효는 책을 쓰면서 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진실로 모든 백성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어 잘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를 찾아야 했다. 더 깊은 고민으로 온 백성들을 위한 실천적 학문을 익히기 위해 원효는 고선사로 자리를 옮겼다.
고요하게 깊은 토함산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길의 태동을 보며 고선사에서 참선에 들었다. 저잣거리를 떠돌며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유랑하던 원효의 자세가 돌변한 것이다.
골굴사에 남아 있는 신라시대부터 전해오고 있는 혈사.
세상사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화두에서 더 깊이 들어가 마음이 머무는 곳에 육신도 함께 머물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참선에 들었다. 원효는 육천통의 실마리를 잡고 토함산 능선을 넘어 임정사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임정사를 크게 중창하고, 석가모니의 기원정사와 첫 글자를 따서 기림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원효는 기림사에서 다시 자신을 찾아가는 고민에 빠졌다. 갖가지 방식의 참선과 혜공스님을 찾아가 문답으로 궁금증을 풀어보는 수행을 이어갔다.
그러다 이미 수백 년 전 인도에서 온 광유선승이 득도한 흔적을 발견하고, 고민하고 고민하던 끝에 육천통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천리 밖에서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경지를 체험하면서 더욱 수련에 매진했다. 원효는 드디어 육천통에 이르렀다. 천시통, 천후통, 천미통, 천촉통, 천이통, 천심통의 능력을 오롯이 터득했다.
원효는 시간을 거슬러 전생에 자신의 모습을 만나고, 다시 내세의 자신을 만나기 위해 혈사에서 석 달 열흘을 벽만 마주하고 참선에서 들었다. 그것이 원효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행위였다. 앉은 자세 그대로 영원한 안식으로 입적했다. 자유로운 몸이 된 것이다.
이미 육신은 의미가 없는 껍질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무가 되고, 참새가 되었다가 토끼·노루가 되는 것도 이미 마음만 먹으면 이루어지는 경지에 이르렀던 그의 깨달음의 깊이는 한량이 없었다.
오직 혈사에 남은 것은 원효의 정신이 빠져나간 육신일 뿐이다. 영원을 사는 생명체가 돼 지금도 신라의 터를 부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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