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파워볼(파워걸) 네임드사다리 파워볼 입출금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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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린운 0 Comments 4 Views 25-11-21 09:36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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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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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규칙: 정통 파워볼(파워걸) 네임드사다리 파워볼 입출금3분 게임의 규칙은 매우 간단합니다. '홀짝'이나 '언더오버' 같은 기본적인 예측 방식만 알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 복잡한 전략보다는 직관과 운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습니다.
빠른 속도: 정통 파워볼(파워걸) 네임드사다리 파워볼 입출금3분 는 라운드가 1분 또는 3분 주기로 진행되므로 짧은 시간에도 많은 게임을 즐길 수 있습니다. 매 라운드마다 빠르게 결과를 확인할 수 있어 지루할 틈이 없으며, 짧은 시간 내에 여러 번의 베팅을 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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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파워볼(파워걸) 네임드사다리 파워볼 입출금3분의 베팅 방법
정통 파워볼(파워걸) 네임드사다리 파워볼 입출금3분의 주요 베팅 방식은 ‘홀짝’과 ‘언더오버’입니다. 홀짝 베팅에서는 사다리의 결과가 홀수일지 짝수일지를 예측하게 됩니다. 결과 값이 홀수면 ‘홀’, 짝수면 ‘짝’에 베팅한 사람이 승리하게 되는 구조로, 직관적이면서도 간단하게 즐길 수 있는 방식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언더오버 베팅이 있습니다. 이 경우 결과 값이 특정 숫자보다 큰지 작은지를 예측하는 방식으로, 예를 들어 결과 값이 중간 기준인 ‘3’보다 작으면 ‘언더’, 크면 ‘오버’에 베팅한 사람이 승리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 방식 외에도, 게임에 따라서는 더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해 보다 세밀한 베팅을 즐길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통 파워볼(파워걸) 네임드사다리 파워볼 입출금3분을 즐기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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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seastorygame.top
● ‘징세(徵稅)’는 세계 정치사 이끈 핵심 동인(動人)● 헨리 8세 ‘교회세’ 욕심이 영국 성공회 탄생 배경● 의회민주주의도 ‘징세’ 둘러싼 다툼에서 생겨난 것● 미국 독립선언, 프랑스 대혁명도 불평등 과세에서 비롯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도 불평등 과세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에서 시작됐다. Gettyimage
인간이나 동물이나 지배자(권력자)가 힘으로 피지배자를 굴복시킨다는 점에서 크게 바다이야기온라인 다르지 않다. 역사와 함께 계속돼 온 인간의 정복과 약탈은 동물의 세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강압 수단 중 인간세계에서만 존재하는 독특한 행위는 징세(徵稅)다. 징세는 폭력을 통해 남의 것을 빼앗는 약탈과는 달리, 제도나 시스템을 이용해 남의 것을 취하는 수탈의 한 형태였다. 성경에서 예수가 세리(稅吏)를 꾸짖은 것도 법치국가가 나오기 알라딘게임 이전에는 징세가 수탈의 한 형태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징세는 세계 정치사를 이끈 동인(動人) 가운데 하나였다. 유사 이래 상대의 돈과 재산을 빼앗으려는 권력자(군주, 교황, 영주 등)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귀족, 평민 등) 간의 투쟁이 있었다. 유럽 전체로 보면 교황과 군주 간의 힘겨루기도 교회세를 차지하기 위한 싸 모바일야마토 움이었지만, 한 국가 내에서도 계급·계층 간 세금을 둘러싼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 나라가 영국이었다. 수탈의 역사는 유럽이거나 동양이거나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텐데, 어째서 유독 영국에서 왕의 과세권(課稅權)에 대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이를 제한하는 선언문이 나오고, 타협과 합의를 중시하는 의회민주주의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필자는 그 이유를 찾기 위 게임릴사이트 해, 지금부터 영국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민족의 용광로 같은 영국의 역사원래 브리튼섬에는 기원전부터 유럽 대륙에서 건너간 켈트족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기원전 55년 카이사르가 처음 원정 온 이후부터 4세기까지 스코틀랜드를 제외한 브리튼섬 전역은 로마가 통치했다. 이후 앵글족과 바다이야기게임방법 색슨족 같은 게르만족이 브리튼섬을 침략하자 로마는 물러났다. 이후 앵글로색슨족이 잉글랜드에 정착하면서 원주민인 켈트족은 점차 북쪽의 스코틀랜드와 서쪽의 웨일스 쪽으로 이주했다. 이때부터 브리튼섬은 오랜 기간 잉글랜드와 함께 웨일스와 스코틀랜드가 대립하면서 공존하는 '한 지붕 세 가족'이 시작된다. 이 시기를 고대 7왕국 시대라고 한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원탁의 기사' 아서왕은 5세기경 앵글로색슨족과 벌인 전쟁에서 고군분투하던 켈트족의 왕이었다. 이후 앵글로색슨족인 알프레드 대왕(재위 871~899)이 최초로 잉글랜드를 통일하면서 웨섹스 왕조가 시작된다. 10세기 바이킹이 쳐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잠시 데인족(지금의 덴마크 쪽 바이킹)이 잉글랜드의 왕이 된 시기도 있었으나 약 200년간 웨섹스 왕조가 이어졌다.
하지만 1066년 노르망디공(公)인 '정복왕' 윌리엄 1세가 영국을 침략하면서 웨섹스 왕조가 무너지고, 영국에는 노르만 왕조가 들어선다. 이들은 10세기 초 프랑스에 쳐들어가 프랑스 왕에게 봉토를 받고 정착한 바이킹의 후손이다. 윌리엄 1세, 윌리엄 2세, 그리고 헨리 1세까지 3대가 노르만 왕조다. 헨리 1세가 프랑스 리옹에서 전사하고,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가 앙주 백작이었던 조프루아 5세와 결혼해서 낳은 아들인 헨리 2세가 1154년 영국 국왕에 즉위하면서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된다. 헨리 2세는 사자왕 리처드의 아버지다. 이후 랭커스터 왕조(1399~1461), 요크 왕조(1461~1485)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모두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은 것이므로 현재까지의 영국 왕조는 모두 노르만 왕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
1536년 헨리 8세 때 웨일스가 잉글랜드에 합병됐고, 1707년 앤 여왕 때 스코틀랜드가 추가로 합병돼 그레이트브리튼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이 탄생한다. 1800년에는 아일랜드가 합병됐으나, 20세기 들어 아일랜드 남부가 공화국으로 독립하면서 현재 영국의 공식 명칭은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종합하면, 영국의 왕족은 노르만족이고, 귀족과 평민은 앵글로색슨족, 켈트족이다. 오랫동안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는 잉글랜드와는 다른 민족으로 구성된 독립된 나라였다. 민족적 관점에서 보면 영국은 식민지정책이 완전히 성공한 나라다. 앵글로색슨족과 켈트족 입장에서 보면, 노르만족은 11세기 자신들의 영토를 침략한 이민족으로, 그 후손들이 지금도 여전히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가 영국이면서 영국 같지 않은 것은 이처럼 오랫동안 다른 나라였던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다.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는 원래 1215년 존 왕이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해 체결한 조약이었다. Gettyimage
근대 헌법의 시초인 마그나카르타잉글랜드의 노르만 왕가와 플랜태저넷 왕가는 영국인이기보다는 프랑스인에 가까웠다. 모두 프랑스 혈통이었고, 프랑스 노르망디에 계속 영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영국에 오래 머물지도 않았고 영어를 잘 구사하지도 못했다. 대부분 노르망디 공국에서 죽었고 거기에 묻혔다. 그들은 영국을 자신의 나라가 아닌, 프랑스 노르망디 공국의 식민지로서 수탈의 대상으로 여겼다.
영국 중세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로빈 후드 이야기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로빈 후드가 활약했던 잉글랜드는 리처드 왕, 존 왕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왕들의 정체성이 프랑스인에서 영국인으로 완전히 바뀌기 이전이었다. 더구나 리처드 왕과 존 왕의 어머니인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프랑스 전체의 3분의 1에 달하는 아키텐의 영주였다. 이 지역은 와인으로 유명한 보르도가 속한 곳이다. 그녀의 첫 남편은 프랑스 카페 왕조의 루이 7세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하고 엘레오노르는 자기보다 열 살이나 어린 영국의 왕세자 헨리와 결혼한다. 바로 헨리 2세다. 이들의 결혼은 프랑스에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엘레오노르가 영국의 왕비가 되면서 프랑스 영토의 3분의 1에 달하는 아키텐이 영국으로 귀속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후일 영국과 프랑스 간 백년전쟁의 원인이 된다.
헨리 2세부터 시작한 플랜태저넷 왕조는 백성들에게 온갖 명목으로 징세를 하면서 백성을 수탈했다. 이슬람 제국의 살라딘이 십자군을 격퇴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헨리 2세는 원정 자금을 모으기 위해 '살라딘 십일조'라는 세금을 부과했지만 십자군을 구성하지도 않았다. 뒤이어 왕이 된 리처드 1세는 십자군 원정을 떠났지만,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신성로마제국의 포로가 된다. 송환의 대가로 신성로마제국이 요구한 몸값은 순은 35t에 해당하는 은화 10만 마르크로, 영국 왕실 연간 수입의 열 배가 넘는 돈이었다. 어머니 엘레오노르는 그를 석방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십일조세를 추가했고, 그 외에 '비겁세'라고 불린 병역면제세와 새로운 토지세도 부과했다.
리처드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그의 동생 존 왕이었다. 그는 프랑스 영지를 대부분 잃어 후세에 '실지왕(失地王)'이라 불리게 된 가장 인기 없는 왕이었다, 존 왕 때 수탈은 극에 달해 '로빈 후드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 그는 17년 재위 기간 중 병역면제세를 11차례나 부과했고, 전임 왕 때 부과했던 토지세 위에 새로운 토지세를 부과했다. 돈을 주고 관직을 팔았으며 이렇게 관직을 산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 백성에게 세금을 다시 부과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겪는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는 원래 1215년 존 왕이 왕의 횡포에 항거해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해 체결한 조약이었다. 그러나 이후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헨리 3세가 대귀족들의 섭정을 받는 상황에서 1225년 수정돼 재반포한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자유민은 그와 동등한 자의 적법한 판정 또는 법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금되거나 재산이 박탈되거나 법적 보호가 박탈되거나 추방당하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다. 이렇게 이 문서는 영국의 성문법이 됐다. 마그나카르타는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기록한 최초의 헌법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왕과 백성의 관계보다는 왕과 귀족의 관계를 규정한 헌장이었다. 후일 귀족의 권리가 평민의 권리로 확대된 것이다.
인두세 부과로 일어난 농민반란마그나카르타로 왕과 귀족이 타협점을 찾고 손을 잡은 후 영국 왕은 비로소 영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1세(재위 1272~1307)는 프랑스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오로지 잉글랜드에 집중해 중앙집권의 기틀을 마련한 왕이었다. 영어를 할 수 있었던 최초의 왕이기도 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 나오듯, 스코틀랜드 지도자 윌리엄 월레스를 사지를 찢어 처형하는 지독한 면도 있었지만, 영국인에겐 추앙받는 왕이었다.
영국이 하나의 국가로서 정체성이 형성되면서 발생한 사건이 백년전쟁(1337~1453)이다. 표면상으로는 에드워드 1세의 손자인 에드워드 3세가 자신이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임을 주장하면서 일으킨 전쟁이지만, 실제는 경제 중심지 플랑드르 지방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었다.
백년전쟁이 한창이던 1379년 군사령관이면서 실질적인 정부 수장이던 랭커스터 공작인 곤트의 존(John of Gaunt)은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인두세를 부과했다. 귀족과 농민 모두가 과세 대상이었고, 1인당 4펜스씩 현금으로 내도록 했다. 원래 일회성으로 시작했지만 2년 후에 다시 거두었고, 세 번째 거둘 때는 1실링으로 올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세금을 피하려고 납세자 등록을 하지 않았다. 1381년 곤트의 존은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관리를 보냈는데 백성들이 이에 반발하면서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와트 타일러와 존 볼이 반란을 이끌었고 이들은 인두세와 농노제의 폐지를 요구했다. 반란군의 세력이 커지면서 런던을 점령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리처드 2세(에드워드 3세의 손자이자 에드워드 흑태자의 아들)가 특허장을 써주면서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자 타일러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재무장관 등을 처형하고 반란군을 해산시킨다. 반란은 거의 성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이후 교회 영지의 몰수 등 더 많은 개혁을 요구하기 위해 스미스필드에서 행해진 회담장에서 타일러가 런던 시장에게 살해당하면서 결국 반란은 수포로 돌아간다.
교회세 얻기 위해 가톨릭과 결별한 헨리 8세비록 반란은 실패했지만, 이 사건이 미친 사회적 영향력은 엄청났다. 영주들이 돈을 받고 농노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면서 농노제가 사실상 폐지돼 중세 근간인 봉건제가 무너지는 신호탄이 된다. 이후 300년간 영국에서 인두세가 폐지됐지만, 그 결과 군사력이 약해져 백년전쟁에서 패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600년 후 인두세에 대한 조세 저항으로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가 실각한 것을 보면, 인두세에 대한 영국인의 반감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 같다.
1485년 보즈워스 전투 승리로 장미전쟁을 끝낸 헨리 7세는 적들을 사면하고 상대편인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해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을 튜더 왕조의 장미 문양 아래로 통합시켰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상인 계층과 손잡고 무역 진흥, 자국 산업 보호 등 중상주의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봉건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확실한 쐐기를 박은 사건은 인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이었다. 이는 봉건제 이래 공동으로 이용하던 경작지(공유지)에 울타리를 쳐서 사유지로 전환한 것을 말한다. 영국의 양모 산업이 발달하면서 봉건 농지를 양 목장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이 경작할 토지를 잃자 토머스 무어는 "양이 사람을 먹는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봉건제는 완전히 무너지고 영국의 정치나 산업 발전에 큰 역할을 하는 젠트리 계층이 부상한다. 튜더 왕조를 거치면서 영국은 토지 기반 경제에서 화폐와 산업 기반 경제로 탈바꿈한다.
1509년에 즉위한 헨리 8세는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그의 형이 요절하면서 왕세자가 됐다. 그의 첫 번째 아내는 '아라곤의 캐서린'으로, 에스파냐 이사벨라 여왕의 딸이자 죽은 형의 아내였다. 헨리 8세와 캐서린은 딸 메리를 뒀지만 둘 사이는 좋지 않았다. 헨리 8세는 왕비의 궁녀였던 앤 불린과 혼인하려 했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캐서린과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헨리 8세는 교황청과 결별을 선언하고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내려 영국 교회를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했다. 헨리 8세가 가톨릭교회와 결별한 것은 표면상으로 이혼을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교황청에 뺏기는 교회세를 자신이 취하려는 속셈이었다. 가톨릭 국가였던 영국은 십일조세를 거둬 교황청으로 보냈는데, 세수 부족으로 고민하던 헨리 8세는 교황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기다렸다는 듯이 교황청과 관계를 끊고 가톨릭교회와 수도원의 재산과 교회세를 차지한 것이다. 그가 교회로부터 빼앗은 토지를 시민에게 팔았는데 이로 인해 형성된 계층이 젠트리(gentry)다.
과도한 세금으로 두 번의 혁명 불러온 스튜어트 왕가영국이 강대국으로 도약하는 데 기반을 닦은 엘리자베스 여왕(재위 1558~1603)이 후사 없이 죽자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인 제임스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17세기가 시작되면서 스튜어트 왕조가 들어선 것이다. 스튜어트 왕조는 무리한 징세로 의회와 갈등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세계 정치사에 큰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다. 스튜어트 왕조가 의회와 백성을 탄압한 이유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신봉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가톨릭을 믿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그 정서가 잉글랜드 주류와 달랐다는 점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1626년 왕이 된 찰스 1세(재위 1625~1649)는 과세를 반대하는 의회를 해산하고 벌금과 선박세를 부과해 왕실 재정을 충당하고자 했다. 그는 기사 작위 압류 조항을 악용해 귀족들에게 세금을 내도록 했고, 이를 내지 않으면 벌금을 부과했다. 또한 비상시에 물리던 선박세를 내륙 지방까지 확대하면서 영구화했다. 이때 존 햄프던(John Hampden)이란 정치인이 선박세를 거부하는데, 그는 "왕이 권한 밖의 것을 요구하면 국민은 거부할 권리가 있다"라고 맞섰다. 그는 비록 재판에서는 패소했지만 지금도 웨스트민스터궁 로비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의회민주주의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왕당파가 의회군에 패배하면서 의회군의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이 호국경이 돼 통치하는 공화정(1653~1658)이 시작된다. Gettyimage
스코틀랜드가 영국을 쳐들어오자 찰스 1세는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1640년 의회를 소집했는데, 의회는 이때 선박세와 기사 작위 압류 조항을 즉각 폐지한다. 결국 1642년 왕당파와 의회파 간에 내전이 터졌다. 전쟁 중에 잡힌 찰스 1세는 재판에 넘겨져 1649년에 처형을 당했고, 찰스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1651년 전투에서 왕당파가 의회군에 패배하면서 의회군의 지도자인 올리버 크롬웰이 호국경이 돼 통치하는 공화정(1653~1658)이 시작된다. 청교도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억압 통치를 지속하던 올리버 크롬웰이 죽자 왕정이 복구됐고 망명했던 찰스 2세가 돌아온다. 하지만 찰스 2세의 행태는 찰스 1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662년 군자금 조달 목적으로 난로세를 부과했고, 런던탑에 보관돼 있던 상인들의 금을 빼앗아 시민들의 원성을 샀다. 영국인들은 난로 1대당 1실링의 세금을 해마다 두 번씩 내야 했다. 건당 수수료를 받던 징수원들은 난로를 찾기 위해 집안 곳곳을 뒤졌기 때문에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던 영국인들은 난로세를 특히 혐오했다. 역사가들은 이 난로세가 명예혁명에 하나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말한다. 찰스 2세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는 가톨릭의 교권을 확대하고자 많은 가톨릭 신자를 상비군에 고용했고, 성공회 주교를 투옥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성공회와 의회의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명예혁명이 발발하면서 제임스 2세는 퇴위당한다.
1861년 발발한 미국 남북전쟁도 관세를 둘러싼 남북 간 대립이 폭발한 것이다. Gettyimage
세계사적 사건 중심에는 늘 징세가 있었다명예혁명으로 취임한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그의 남편 오렌지공 윌리엄 3세는 취임하자마자 난로세를 폐지했다. 왕을 추대한 의회는 과세에 대한 의회동의권, 의회소집권과 발언의 자유 등을 규정한 권리장전(Bill of Rights)을 새로운 국왕에게 요구했고, 국왕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입헌군주제가 시작된다. 그렇다고 재정적 어려움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가 영국과 전쟁을 선포하자 영국은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을 만든다. 1696년 부과된 창문세다. 창문세는 유리창의 개수에 따라 부과됐는데, 창문의 개수가 6개 이하면 면제였지만, 7개부터 세금이 부과되고 심지어 창문 수에 따라 세금이 늘어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금액이 점차 커지자 시민들은 창문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햇볕이 차단되자 전염병이 돌면서 시민들의 건강을 위협했다. 그럼에도 창문세는 1851년 폐지되기 전까지 약 150년 동안 유지됐다.
영국은 강국으로 부상하기 전까지 많은 내홍을 겪었다. 그 중심에는 늘 징세가 있었다. 플랜태저넷 왕조의 무리한 과세는 로빈 후드 이야기와 마그나카르타를 낳았고, 튜더 왕조 헨리 8세의 교회세를 차지하려는 욕심은 영국 성공회를 탄생시켰다. 스튜어트 왕조의 무리한 과세는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 그리고 권리장전을 낳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의회민주주의라는 역사적 발명품이 징세를 둘러싼 다툼을 통해 탄생한 것이다.
징세가 트리거(trigger)가 된 세계사적 사건이 영국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은 영국의 무리한 과세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됐고,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도 불평등 과세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에서 시작됐다. 1861년 터진 미국 남북전쟁도 실질적으로는 관세를 둘러싼 남북 간의 대립이 폭발한 것이었다. 이렇듯 징세는 세계사의 일부를 넘어, 세계사의 변화를 주도했다. 돈의 흐름을 따라가면 인간의 실체가 보이고 이를 둘러싼 인간의 행동양식이 역사라는 한 작가의 말이 가슴에 깊이 와닿는다.
강승준● 1965년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美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행정고시 제35회● 前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 前 한국은행 감사● 現 서울과기대 대외국제부총장● 저서 : '역사는 돈이다'
강승준 서울과기대 부총장·경제학 박사·前 한국은행 감사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도 불평등 과세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에서 시작됐다. Gettyimage
인간이나 동물이나 지배자(권력자)가 힘으로 피지배자를 굴복시킨다는 점에서 크게 바다이야기온라인 다르지 않다. 역사와 함께 계속돼 온 인간의 정복과 약탈은 동물의 세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강압 수단 중 인간세계에서만 존재하는 독특한 행위는 징세(徵稅)다. 징세는 폭력을 통해 남의 것을 빼앗는 약탈과는 달리, 제도나 시스템을 이용해 남의 것을 취하는 수탈의 한 형태였다. 성경에서 예수가 세리(稅吏)를 꾸짖은 것도 법치국가가 나오기 알라딘게임 이전에는 징세가 수탈의 한 형태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징세는 세계 정치사를 이끈 동인(動人) 가운데 하나였다. 유사 이래 상대의 돈과 재산을 빼앗으려는 권력자(군주, 교황, 영주 등)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귀족, 평민 등) 간의 투쟁이 있었다. 유럽 전체로 보면 교황과 군주 간의 힘겨루기도 교회세를 차지하기 위한 싸 모바일야마토 움이었지만, 한 국가 내에서도 계급·계층 간 세금을 둘러싼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 나라가 영국이었다. 수탈의 역사는 유럽이거나 동양이거나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텐데, 어째서 유독 영국에서 왕의 과세권(課稅權)에 대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이를 제한하는 선언문이 나오고, 타협과 합의를 중시하는 의회민주주의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필자는 그 이유를 찾기 위 게임릴사이트 해, 지금부터 영국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민족의 용광로 같은 영국의 역사원래 브리튼섬에는 기원전부터 유럽 대륙에서 건너간 켈트족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기원전 55년 카이사르가 처음 원정 온 이후부터 4세기까지 스코틀랜드를 제외한 브리튼섬 전역은 로마가 통치했다. 이후 앵글족과 바다이야기게임방법 색슨족 같은 게르만족이 브리튼섬을 침략하자 로마는 물러났다. 이후 앵글로색슨족이 잉글랜드에 정착하면서 원주민인 켈트족은 점차 북쪽의 스코틀랜드와 서쪽의 웨일스 쪽으로 이주했다. 이때부터 브리튼섬은 오랜 기간 잉글랜드와 함께 웨일스와 스코틀랜드가 대립하면서 공존하는 '한 지붕 세 가족'이 시작된다. 이 시기를 고대 7왕국 시대라고 한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원탁의 기사' 아서왕은 5세기경 앵글로색슨족과 벌인 전쟁에서 고군분투하던 켈트족의 왕이었다. 이후 앵글로색슨족인 알프레드 대왕(재위 871~899)이 최초로 잉글랜드를 통일하면서 웨섹스 왕조가 시작된다. 10세기 바이킹이 쳐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잠시 데인족(지금의 덴마크 쪽 바이킹)이 잉글랜드의 왕이 된 시기도 있었으나 약 200년간 웨섹스 왕조가 이어졌다.
하지만 1066년 노르망디공(公)인 '정복왕' 윌리엄 1세가 영국을 침략하면서 웨섹스 왕조가 무너지고, 영국에는 노르만 왕조가 들어선다. 이들은 10세기 초 프랑스에 쳐들어가 프랑스 왕에게 봉토를 받고 정착한 바이킹의 후손이다. 윌리엄 1세, 윌리엄 2세, 그리고 헨리 1세까지 3대가 노르만 왕조다. 헨리 1세가 프랑스 리옹에서 전사하고,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가 앙주 백작이었던 조프루아 5세와 결혼해서 낳은 아들인 헨리 2세가 1154년 영국 국왕에 즉위하면서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된다. 헨리 2세는 사자왕 리처드의 아버지다. 이후 랭커스터 왕조(1399~1461), 요크 왕조(1461~1485)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모두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은 것이므로 현재까지의 영국 왕조는 모두 노르만 왕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
1536년 헨리 8세 때 웨일스가 잉글랜드에 합병됐고, 1707년 앤 여왕 때 스코틀랜드가 추가로 합병돼 그레이트브리튼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이 탄생한다. 1800년에는 아일랜드가 합병됐으나, 20세기 들어 아일랜드 남부가 공화국으로 독립하면서 현재 영국의 공식 명칭은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종합하면, 영국의 왕족은 노르만족이고, 귀족과 평민은 앵글로색슨족, 켈트족이다. 오랫동안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는 잉글랜드와는 다른 민족으로 구성된 독립된 나라였다. 민족적 관점에서 보면 영국은 식민지정책이 완전히 성공한 나라다. 앵글로색슨족과 켈트족 입장에서 보면, 노르만족은 11세기 자신들의 영토를 침략한 이민족으로, 그 후손들이 지금도 여전히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가 영국이면서 영국 같지 않은 것은 이처럼 오랫동안 다른 나라였던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다.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는 원래 1215년 존 왕이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해 체결한 조약이었다. Gettyimage
근대 헌법의 시초인 마그나카르타잉글랜드의 노르만 왕가와 플랜태저넷 왕가는 영국인이기보다는 프랑스인에 가까웠다. 모두 프랑스 혈통이었고, 프랑스 노르망디에 계속 영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영국에 오래 머물지도 않았고 영어를 잘 구사하지도 못했다. 대부분 노르망디 공국에서 죽었고 거기에 묻혔다. 그들은 영국을 자신의 나라가 아닌, 프랑스 노르망디 공국의 식민지로서 수탈의 대상으로 여겼다.
영국 중세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로빈 후드 이야기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로빈 후드가 활약했던 잉글랜드는 리처드 왕, 존 왕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왕들의 정체성이 프랑스인에서 영국인으로 완전히 바뀌기 이전이었다. 더구나 리처드 왕과 존 왕의 어머니인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프랑스 전체의 3분의 1에 달하는 아키텐의 영주였다. 이 지역은 와인으로 유명한 보르도가 속한 곳이다. 그녀의 첫 남편은 프랑스 카페 왕조의 루이 7세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하고 엘레오노르는 자기보다 열 살이나 어린 영국의 왕세자 헨리와 결혼한다. 바로 헨리 2세다. 이들의 결혼은 프랑스에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엘레오노르가 영국의 왕비가 되면서 프랑스 영토의 3분의 1에 달하는 아키텐이 영국으로 귀속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후일 영국과 프랑스 간 백년전쟁의 원인이 된다.
헨리 2세부터 시작한 플랜태저넷 왕조는 백성들에게 온갖 명목으로 징세를 하면서 백성을 수탈했다. 이슬람 제국의 살라딘이 십자군을 격퇴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헨리 2세는 원정 자금을 모으기 위해 '살라딘 십일조'라는 세금을 부과했지만 십자군을 구성하지도 않았다. 뒤이어 왕이 된 리처드 1세는 십자군 원정을 떠났지만,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신성로마제국의 포로가 된다. 송환의 대가로 신성로마제국이 요구한 몸값은 순은 35t에 해당하는 은화 10만 마르크로, 영국 왕실 연간 수입의 열 배가 넘는 돈이었다. 어머니 엘레오노르는 그를 석방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십일조세를 추가했고, 그 외에 '비겁세'라고 불린 병역면제세와 새로운 토지세도 부과했다.
리처드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그의 동생 존 왕이었다. 그는 프랑스 영지를 대부분 잃어 후세에 '실지왕(失地王)'이라 불리게 된 가장 인기 없는 왕이었다, 존 왕 때 수탈은 극에 달해 '로빈 후드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 그는 17년 재위 기간 중 병역면제세를 11차례나 부과했고, 전임 왕 때 부과했던 토지세 위에 새로운 토지세를 부과했다. 돈을 주고 관직을 팔았으며 이렇게 관직을 산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 백성에게 세금을 다시 부과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겪는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는 원래 1215년 존 왕이 왕의 횡포에 항거해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해 체결한 조약이었다. 그러나 이후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헨리 3세가 대귀족들의 섭정을 받는 상황에서 1225년 수정돼 재반포한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자유민은 그와 동등한 자의 적법한 판정 또는 법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금되거나 재산이 박탈되거나 법적 보호가 박탈되거나 추방당하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다. 이렇게 이 문서는 영국의 성문법이 됐다. 마그나카르타는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기록한 최초의 헌법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왕과 백성의 관계보다는 왕과 귀족의 관계를 규정한 헌장이었다. 후일 귀족의 권리가 평민의 권리로 확대된 것이다.
인두세 부과로 일어난 농민반란마그나카르타로 왕과 귀족이 타협점을 찾고 손을 잡은 후 영국 왕은 비로소 영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1세(재위 1272~1307)는 프랑스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오로지 잉글랜드에 집중해 중앙집권의 기틀을 마련한 왕이었다. 영어를 할 수 있었던 최초의 왕이기도 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 나오듯, 스코틀랜드 지도자 윌리엄 월레스를 사지를 찢어 처형하는 지독한 면도 있었지만, 영국인에겐 추앙받는 왕이었다.
영국이 하나의 국가로서 정체성이 형성되면서 발생한 사건이 백년전쟁(1337~1453)이다. 표면상으로는 에드워드 1세의 손자인 에드워드 3세가 자신이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임을 주장하면서 일으킨 전쟁이지만, 실제는 경제 중심지 플랑드르 지방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었다.
백년전쟁이 한창이던 1379년 군사령관이면서 실질적인 정부 수장이던 랭커스터 공작인 곤트의 존(John of Gaunt)은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인두세를 부과했다. 귀족과 농민 모두가 과세 대상이었고, 1인당 4펜스씩 현금으로 내도록 했다. 원래 일회성으로 시작했지만 2년 후에 다시 거두었고, 세 번째 거둘 때는 1실링으로 올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세금을 피하려고 납세자 등록을 하지 않았다. 1381년 곤트의 존은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관리를 보냈는데 백성들이 이에 반발하면서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와트 타일러와 존 볼이 반란을 이끌었고 이들은 인두세와 농노제의 폐지를 요구했다. 반란군의 세력이 커지면서 런던을 점령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리처드 2세(에드워드 3세의 손자이자 에드워드 흑태자의 아들)가 특허장을 써주면서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자 타일러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재무장관 등을 처형하고 반란군을 해산시킨다. 반란은 거의 성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이후 교회 영지의 몰수 등 더 많은 개혁을 요구하기 위해 스미스필드에서 행해진 회담장에서 타일러가 런던 시장에게 살해당하면서 결국 반란은 수포로 돌아간다.
교회세 얻기 위해 가톨릭과 결별한 헨리 8세비록 반란은 실패했지만, 이 사건이 미친 사회적 영향력은 엄청났다. 영주들이 돈을 받고 농노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면서 농노제가 사실상 폐지돼 중세 근간인 봉건제가 무너지는 신호탄이 된다. 이후 300년간 영국에서 인두세가 폐지됐지만, 그 결과 군사력이 약해져 백년전쟁에서 패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600년 후 인두세에 대한 조세 저항으로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가 실각한 것을 보면, 인두세에 대한 영국인의 반감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 같다.
1485년 보즈워스 전투 승리로 장미전쟁을 끝낸 헨리 7세는 적들을 사면하고 상대편인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해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을 튜더 왕조의 장미 문양 아래로 통합시켰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상인 계층과 손잡고 무역 진흥, 자국 산업 보호 등 중상주의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봉건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확실한 쐐기를 박은 사건은 인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이었다. 이는 봉건제 이래 공동으로 이용하던 경작지(공유지)에 울타리를 쳐서 사유지로 전환한 것을 말한다. 영국의 양모 산업이 발달하면서 봉건 농지를 양 목장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이 경작할 토지를 잃자 토머스 무어는 "양이 사람을 먹는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봉건제는 완전히 무너지고 영국의 정치나 산업 발전에 큰 역할을 하는 젠트리 계층이 부상한다. 튜더 왕조를 거치면서 영국은 토지 기반 경제에서 화폐와 산업 기반 경제로 탈바꿈한다.
1509년에 즉위한 헨리 8세는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그의 형이 요절하면서 왕세자가 됐다. 그의 첫 번째 아내는 '아라곤의 캐서린'으로, 에스파냐 이사벨라 여왕의 딸이자 죽은 형의 아내였다. 헨리 8세와 캐서린은 딸 메리를 뒀지만 둘 사이는 좋지 않았다. 헨리 8세는 왕비의 궁녀였던 앤 불린과 혼인하려 했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캐서린과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헨리 8세는 교황청과 결별을 선언하고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내려 영국 교회를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했다. 헨리 8세가 가톨릭교회와 결별한 것은 표면상으로 이혼을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교황청에 뺏기는 교회세를 자신이 취하려는 속셈이었다. 가톨릭 국가였던 영국은 십일조세를 거둬 교황청으로 보냈는데, 세수 부족으로 고민하던 헨리 8세는 교황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기다렸다는 듯이 교황청과 관계를 끊고 가톨릭교회와 수도원의 재산과 교회세를 차지한 것이다. 그가 교회로부터 빼앗은 토지를 시민에게 팔았는데 이로 인해 형성된 계층이 젠트리(gentry)다.
과도한 세금으로 두 번의 혁명 불러온 스튜어트 왕가영국이 강대국으로 도약하는 데 기반을 닦은 엘리자베스 여왕(재위 1558~1603)이 후사 없이 죽자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인 제임스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17세기가 시작되면서 스튜어트 왕조가 들어선 것이다. 스튜어트 왕조는 무리한 징세로 의회와 갈등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세계 정치사에 큰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다. 스튜어트 왕조가 의회와 백성을 탄압한 이유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신봉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가톨릭을 믿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그 정서가 잉글랜드 주류와 달랐다는 점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1626년 왕이 된 찰스 1세(재위 1625~1649)는 과세를 반대하는 의회를 해산하고 벌금과 선박세를 부과해 왕실 재정을 충당하고자 했다. 그는 기사 작위 압류 조항을 악용해 귀족들에게 세금을 내도록 했고, 이를 내지 않으면 벌금을 부과했다. 또한 비상시에 물리던 선박세를 내륙 지방까지 확대하면서 영구화했다. 이때 존 햄프던(John Hampden)이란 정치인이 선박세를 거부하는데, 그는 "왕이 권한 밖의 것을 요구하면 국민은 거부할 권리가 있다"라고 맞섰다. 그는 비록 재판에서는 패소했지만 지금도 웨스트민스터궁 로비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의회민주주의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왕당파가 의회군에 패배하면서 의회군의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이 호국경이 돼 통치하는 공화정(1653~1658)이 시작된다. Gettyimage
스코틀랜드가 영국을 쳐들어오자 찰스 1세는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1640년 의회를 소집했는데, 의회는 이때 선박세와 기사 작위 압류 조항을 즉각 폐지한다. 결국 1642년 왕당파와 의회파 간에 내전이 터졌다. 전쟁 중에 잡힌 찰스 1세는 재판에 넘겨져 1649년에 처형을 당했고, 찰스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1651년 전투에서 왕당파가 의회군에 패배하면서 의회군의 지도자인 올리버 크롬웰이 호국경이 돼 통치하는 공화정(1653~1658)이 시작된다. 청교도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억압 통치를 지속하던 올리버 크롬웰이 죽자 왕정이 복구됐고 망명했던 찰스 2세가 돌아온다. 하지만 찰스 2세의 행태는 찰스 1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662년 군자금 조달 목적으로 난로세를 부과했고, 런던탑에 보관돼 있던 상인들의 금을 빼앗아 시민들의 원성을 샀다. 영국인들은 난로 1대당 1실링의 세금을 해마다 두 번씩 내야 했다. 건당 수수료를 받던 징수원들은 난로를 찾기 위해 집안 곳곳을 뒤졌기 때문에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던 영국인들은 난로세를 특히 혐오했다. 역사가들은 이 난로세가 명예혁명에 하나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말한다. 찰스 2세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는 가톨릭의 교권을 확대하고자 많은 가톨릭 신자를 상비군에 고용했고, 성공회 주교를 투옥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성공회와 의회의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명예혁명이 발발하면서 제임스 2세는 퇴위당한다.
1861년 발발한 미국 남북전쟁도 관세를 둘러싼 남북 간 대립이 폭발한 것이다. Gettyimage
세계사적 사건 중심에는 늘 징세가 있었다명예혁명으로 취임한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그의 남편 오렌지공 윌리엄 3세는 취임하자마자 난로세를 폐지했다. 왕을 추대한 의회는 과세에 대한 의회동의권, 의회소집권과 발언의 자유 등을 규정한 권리장전(Bill of Rights)을 새로운 국왕에게 요구했고, 국왕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입헌군주제가 시작된다. 그렇다고 재정적 어려움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가 영국과 전쟁을 선포하자 영국은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을 만든다. 1696년 부과된 창문세다. 창문세는 유리창의 개수에 따라 부과됐는데, 창문의 개수가 6개 이하면 면제였지만, 7개부터 세금이 부과되고 심지어 창문 수에 따라 세금이 늘어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금액이 점차 커지자 시민들은 창문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햇볕이 차단되자 전염병이 돌면서 시민들의 건강을 위협했다. 그럼에도 창문세는 1851년 폐지되기 전까지 약 150년 동안 유지됐다.
영국은 강국으로 부상하기 전까지 많은 내홍을 겪었다. 그 중심에는 늘 징세가 있었다. 플랜태저넷 왕조의 무리한 과세는 로빈 후드 이야기와 마그나카르타를 낳았고, 튜더 왕조 헨리 8세의 교회세를 차지하려는 욕심은 영국 성공회를 탄생시켰다. 스튜어트 왕조의 무리한 과세는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 그리고 권리장전을 낳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의회민주주의라는 역사적 발명품이 징세를 둘러싼 다툼을 통해 탄생한 것이다.
징세가 트리거(trigger)가 된 세계사적 사건이 영국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은 영국의 무리한 과세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됐고,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도 불평등 과세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에서 시작됐다. 1861년 터진 미국 남북전쟁도 실질적으로는 관세를 둘러싼 남북 간의 대립이 폭발한 것이었다. 이렇듯 징세는 세계사의 일부를 넘어, 세계사의 변화를 주도했다. 돈의 흐름을 따라가면 인간의 실체가 보이고 이를 둘러싼 인간의 행동양식이 역사라는 한 작가의 말이 가슴에 깊이 와닿는다.
강승준● 1965년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美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행정고시 제35회● 前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 前 한국은행 감사● 現 서울과기대 대외국제부총장● 저서 : '역사는 돈이다'
강승준 서울과기대 부총장·경제학 박사·前 한국은행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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