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글로벌 블레싱Global Blessing’ 상임대표로 북한의 장애인을 위한 협력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이 사역을 위해 지난해 12월 평양을 방문했다. 짧은 체류기간이었지만 개인적으로 ‘무신(無神)의 도시’라 일컬어지는 이곳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방식대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계신다’라는 믿음을 갖기에 충분했다. 사실 ‘하나님이 아니 계신 곳이 어디 있으며, 계신 곳에서 당신의 뜻을 펼치지 않는 곳은 또 어디 있으랴!’
포도주가 다 떨어져서, 자칫 잔치가 망해버릴 수도 있었던 위기 닥친 가나의 혼인잔치에 주님이 계셨듯이, 지금 북녘땅에도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고통받는 동포가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며 믿음으로 간청해야 한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평화와 통일은 아직 요원한 사건이라고 말하기 전에, 지금 이 땅에서 얼마나 평화와 화해, 통일이 필요한지를 안다면 마리아처럼 우리는 더욱 간절히 청해야 한다.
칠곡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칠곡교회는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가 강반석 집사가 다녔던 교회로 어린 시절 김일성 주석도 자주 다녔던 교회다. 한국전쟁 시기에 파괴되었던 것을 1989년에 재건했다. 봉수교회와 더불어 평양에 있는 두 교회 중 하나다.
우리고 도착했을 때 교회에는 100여 명의 교인이 모여 있었다. 예배공간과 예배순서와 기도와 찬송 등 모든 것이 우리의 6, 70년대 예배의 모습 그대로였다. 성가대는 적은 인원에 비해 찬양 소리가 우렁찼고, 또 음악적 수준이 높았다. 평양의 교우들과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며 예배하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들의 예배의 진정성 여부를 의심할 여지도 이유도 없었다.
간혹 북한의 기독교인을 언급할 때 ‘가짜교인’ 혹은 ‘진짜 교인’ 운운하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들을 판단하고 무시하기 전에, 만약 예배드리는 이들 중에 ‘가짜교인’이 있다면, ‘진짜 교인’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진짜 교인이 있다면,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가 더욱 드러나기를 기도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또한 우리 한국교회에도 ‘가짜교인’들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그 어느 때 보다 남과 북 기독교인들부터 서로를 인정하는 신뢰가 필요하다. 그리고 독일통일 과정에서 보였듯이 남북의 기독교인들이 평화와 통일을 위한 함께 기도해야 한다.
이 땅의 평화와 통일은 개인과 민족, 전 세계를 변화시키는 가장 분명하고도 확실한 희년 사건이다. 그것은 세계가 놀랄만한 하나의 기적 사건이 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더욱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리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믿음으로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 그렇게 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그럴 일도 없겠지만, 가나 혼인 잔치에서 주님처럼, ‘나와 너희 남과 북의 통일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되물으신다고 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믿음과 간절함으로 매달려야 한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남북의 평화통일보다 하나님의 함께하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드러내는 해방의 사건도 없기 때문이다.
가나의 혼인 잔치의 두 번째 변화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변화였다. 본래 이 항아리에 채운 물은 먹을 수 있는 물이 아니라 손과 발을 씻는 물이었다. 이 보잘것없는 물이 이제는 변하여 공동체를 만족시키는 맛 좋은 포도주가 되었다. 이것은 양의 변화가 아니라 질적인 변화, 즉 존재의 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다 그렇게 존재로 변화된 사람들이 아닌가? 그저 평범하고, 약하고, 세상에 영향력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아니던가!
구약시대에 선포된 희년제도는 사회, 경제, 문화 제도의 변화와 해방을 지향했다. 이제 예수님 이후에 희년사건은 단순히 시스템이나 문화의 변화만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까지 일으킨다. 따라서 희년사상의 실천 영역은 존재의 변화를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희년사건으로서 남북평화로의 변화는 단순히 국가체제나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그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결국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 가치, 의식과 문화 등 삶의 질적 변화에 이르러야 한다. 자유와 민주와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 사회적 평등과 평화뿐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평화와 행복을 지향하는 사회로서의 변화다.
이 물의 변화와 연결되어 의미 있게 다가오는 변화가 바로 항아리의 변화이다. 본래 이 항아리 또한 손발 씻는 물을 담는 항아리로써 별로 귀한 물항아리가 아니었다. 아마도 투박한 항아리 표면에는 온갖 흙먼지와 더러움이 묻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맛 좋고 귀한 포도주를 담은 귀한 항아리로 변화되었다. 형태, 재질은 그대로이지만 그 담은 내용에 따라 귀한 그릇으로 변화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저 유명한 바울의 고백이 떠오른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장 7절)
이 기적을 일으키신 분은 하나님이다. 질그릇같이 값싼 그릇인 우리의 삶에,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담게 된 것! 이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다. 희년사건으로 남북의 평화통일은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질적인 변화와 더불어 이 땅 자체가 하나님이 사용이라는 귀한 나라로 변화되기를 기도한다. 통일된 이 땅이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 변화되기를 희망한다.
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변화된 사람은 또 있다. 바로 연회장 파티 총기획자이다. 그는 잔치 음식의 수급을 주관하는 사람이었다. 그 연회장은 새 포도주를 맛보고는 놀라서 외친다.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는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다음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 법인데 이 좋은 포도주가 아직 있으니 이게 웬일인가?” 그는 다른 잔칫집과 달리, 이 잔칫집은 마지막을 위해 더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둔 것으로 이해했다. 이것은 그가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일반 상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구약시대, 희년제도 또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있는 비상식적인 제도였다. 오늘날 희년사건이 가져오는 혁명적인 변화는 상식을 뒤엎는 변화다. 희년사건으로서 평화와 통일 또한 기존 체제유지, 혹은 경제적, 군사적인 이해득실 등에 따른 상식적 판단과 결정으로 이뤄질 수 없다. 즉 평화에 대한 우리 생각과 가치판단, 기준, 실천방향에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간디의 말처럼 ‘평화를 향한 길은 없으며 평화 그 자체가 길이다’.
이 기적을 통해 또 변화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제자들이다. 당시 제자들은 이제 막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들은 아직 예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 그들이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기적을 보고 비로소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제자들은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 그 자체만을 보고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다. 이 영광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현존을 뜻한다. 즉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본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을 통해 계속 일어나야 할 희년사건으로서 평화통일은 궁극적으로는 그 변화를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의 현존이 드러나고,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희년사건 자체가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북한 장애인들을 위한 우리의 작은 사랑의 실천과 협력 사업 또한 하나님이 일하시는 희년사건의 과정이라고 믿는다. 우리의 사랑과 섬김이 자연스럽게 이 세계에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고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일으키는 진정한 기적 중의 기적이 될 것이다.